‘국민요정’ 슈 해외 상습 도박 혐의 불구속 기소…사기·국내 도박은 ‘무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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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S.E.S 출신의 방송인 슈가 수억원대의 해외 상습 도박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해외 영주권자인 슈의 국내 도박과 사기 혐의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됐다. ] 걸그룹 S.E.S 출신의 방송인 슈(유수영·37)가 해외에서 수 억 원대의 도박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사기 및 국내 도박 혐의는 무혐의 처분됐다. 28일 경향신문에 따르며 서울동부지검 형사2부는 슈를 상습도박 혐의로 최근 불구속 기소했다.youtube.com 슈는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마카오 도박장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수 억 원대 도박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슈의 도박 의혹은 지난 6월 서울 광진구 한 호텔 카지노에서 각각 3억5000만원과 2억5000만원을 빌려줬지만 돌려받지 못했다는 혐의(사기)로 미국인 박모 씨와 한국인 윤모 씨 등 2명에게 고소당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알려지게 됐다. 해당 카지노는 외국인 전용이지만 슈는 일본 영주권이 있어 출입이 가능했다. 검찰은 수사 결과 고소인들이 슈에게 빌려준 자금을 특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리고 사기 혐의에 대해선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또한 국내 호텔 카지노 도박 혐의도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관광진흥법상 내국인은 강원랜드만 출입할 수 있지만 슈의 경우 해외 영주권자로서 �[https://www.youtube.com/watch?v=S3_xDutsjjE �국인] 전용 카지노에 들어가 도박을 한 만큼 특례조항을 적용받는다고 봤다.


로 확률형 아이템 상품 논란에 불을 지핀 EA가 법정에 설 위기에 몰렸다. 11일 벨기에 현지 매체 nieuwsblad, Metrotime 등은 벨기에 브뤼셀 검찰과 현지 게임위원회가 EA에 법적 조치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 벨기에 도박법을 위반했는지 조사하고 있으며 소송 여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에서 구입할 수 있는 확률형 아이템 '얼티밋 팀 카드 팩'이다. 해당 상품을 구입하면 게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선수를 무작위로 획득할 수 있다. 등 소위 '전리품 상자'의 형태로 판매되는 확률형 아이템이 벨기에의 도박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벨기에 게임위원회가 정의하는 도박이란, 무작위성을 바탕으로 참가자 중 한 명 이상이 손실이나 이득을 취하고, 행위로 얻은 결과가 게임의 승패를 결정하거나 혹은 도움이 되며 결과물의 크기가 좌우되는 모든 행위다. 또한 앞서 언급한 게임의 확률형 아이템이 도박의 요소인 게임, 베팅, 기회와 승패를 모두 포함하여 미성년자에게 악영향을 주므로, 해당 콘텐츠 판매를 금지하는 추가 법안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첨부되어 있다.youtube.com 벨기에 도박법은 도박 요소에 엄격한 나이 제한을 둔다.


먼저 미성년자에게는 도박성이 있는 모든 행위가 일체 금지되며 18세 이상에게는 복권과 배팅, 21세 이상에게 카지노 게임을 서비스할 수 있다. 은 도박법을 어겼다는 유권 해석이 가능한 상태다. 다만 구체적인 명문으로 게임의 확률형 아이템 판매를 막을 수 있는 법안은 없다. 또한 벨기에의 조치가 화제가 된 5월, EA 앤드류 윌슨 CEO는 5월 컨퍼런스 콜을 통해 "플레이어들은 확률형 아이템에서 무엇을 얻을지 알고 있으며, 아이템이나 게임 속 화폐를 현금으로 교환할 수 없기 때문에 도박이 아니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과 함께 도박법을 위반했다고 지목된 게임은 벨기에 지역에 한해 확률형 아이템 상품 판매를 중단하거나 콘텐츠 접근을 제한했지만, EA는 아이템 획득 확률을 고지한 것 외에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볼 때, EA는 벨기에 게임위원회의 유권 해석에 따르기보다는 벨기에 법원의 구체적인 판결에 대비하는 방침인 것으로 추측된다. 가 논란이 된 지난해, 영국에서 청소년 이용가 게임의 확률형 아이템을 도박법으로 규제하라는 1만 명의 시민 청원이 있었다. 하지만 영국 사행산업위원회는 게임의 확률형 아이템이 환금성이 없다는 이유로 도박과 다르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다만 벨기에의 경우, 지난해부터 벨기에 법무부 코엔 긴스 장관이 확률형 아이템을 도박으로 간주하는 강경한 입장을 지속적으로 내놓고 있어 영국과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예단하기 힘든 상황이다. 는 7월부터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전리품 상자를 개봉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는 지난 8월 24일 유료 재화로 게임 내 랜덤 선수 팩과 유저 간 거래 콘텐츠를 삭제했다고 공지하기도 했다. 벨기에 이용자들이 전리품 상자를 살 수 없도록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어쩌다 보니 연작 시리즈가 되어버린 한국 위스키 이야기. 옛날 위스키 중에 제일 유명한 위스키는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도라지 위스키가 아닐까 합니다. 최백호 본인이 '내가 도라지 위스키를 마셔본 마지막 세대'라고 자칭 할정도로 나이 지긋하신 분의 추억에나 존재하던 고전입니다. 묘하게 토속적인 이름이 인상적인데, 60년대 중반까지 팔리던 도라지 위스키는 실은 도리스 위스키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갑자기 이름이 바뀌는데 2월에 도리스 위스키를 만드는 국제 양조장 사장이 명예훼손으로 구속되는 사건이 영향을 끼쳤을 것 같습니다. 이름과는 달리 도라지는 안들어갔습니다. 50년대와 60년대를 대표하는 위스키는 도라지 위스키와 백양 위스키, 쌍마 위스키가 있었습니다. 광고 크기만 봐도 점유율이 대충 어땠을지 감이 옵니다. 이 시절의 위스키는 위스키가 아니라, 주정(양조알콜)에 일본에서 수입한 위스키 향을 섞은 '위스키 맛 소주'였습니다.


위스키 원액이 들어간 위스키가 처음 나온 것은 1971년이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위스키는 청양산업이 주월 국군용으로 판매한 군납 위스키였습니다. 물론 이쪽도 위스키 원액이 20%미만인 기타 제재주였습니다. 시중에 위스키가 시판되는 것은 조금 뒤의 일입니다. 1973년에 백화양조와 진로가 해외수출을 조건부로 위스키 원액 수입을 허가받습니다. 해외수출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백화양조도 진로도 처음 만든 위스키는 인삼 위스키였습니다. 일단 수출용 위스키를 위해 원액을 수입했지만, 역시 최종 목표는 국내에 위스키를 판매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백화 양조는 '죠니 드레이크' 진로는 'JR위스키'를 발매합니다. 죠지드레이크와 JR의 싸움은 죠지드레이크의 승리였습니다. 일년 일찍 시장에 나온 덕분도 있겠지만, 병 모양이 발렌타인과 비슷해서 잘 팔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설마 그럴까 싶지만, JR 위스키 역시 이름도 그렇고, 녹색병에 노란색 병으로 JB 위스키를 빼다 박았습니다.


이 어디서 많이 본듯한 병모양은 후대에도 이어집니다. 죠지 드레이크도 JR도 정통 스카치 위스크를 자처하지만, 죠지 드레이크도 JR도 당시 법에 따르면 위스키가 아닌 기타재제주였습니다. 위스키라는 이름을 쓰려면 원액 함량이 20%가 넘어야 하지만, 200%인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원액 함량을 아슬아슬하게 19,9%에 맞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좀 먹고 살기 시작하면서 수입양주을 대체하기 위한 국산양주를 만들기 위해, 국산 위스키 원액 생산시설을 갖추는 대신 위스키 생산허가를 내줍니다. 이때 생산 허가를 받은 곳은 여러군데지만 결국 위스키 원액을 생산하게 되는 곳은 백화양조와 진로, 그리고 브랜디를 열심히 만들던 해태주조 세 군데 뿐이었습니다. 위스키 시장을 일단 정리한 정부는 제일 잘 팔리던 죠지드레이크에 철퇴를 가합니다. 죄명은 양두구육. 위스키의 이름을 걸고 기타재제주를 판 죄를 물어 법인세 6천만원을 추징�[https://www.youtube.com/watch?v=igklUnHs8lI �니다].


그래서 백화양조는 죠지드레이크 대신 한국 기준으로 위스키인 베리나인을 진로는 JR대신 길벗을 출시합니다. 그리고 새로 참전한 해태주조가 드슈를 출시하면서 위스키 전쟁의 2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참고로 한국 기준으로 위스키라는 것은 위스키 원액 함량이 20%이상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Gilbert이라 쓰고 길벗이라고 읽는 진로의 네이밍 센스가 돋보이지만, 오히려 이 토속적인 이름과 이미지 때문에 훗날 실패한 브랜드 네이밍 사례로 두고두고 이야기 됩니다.youtube.com 무려 정비석 선생님이 출연한 TV광고가 있을 정도로 광고에도 힘을 들였지만, 백화양조의 베리나인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해태주조의 드슈는 일찌감치 떨어져 나가고 백화양조 베리나인의 독주를 진로의 길벗이 가까스로 따라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25% 위스키 시대는 금방 막을 내리고 30% 위스키 시대가 옵니다. 정부의 국산주류 개발계획에 따라 위스키 원액으로 만든 기타제재주 규모를 줄이고 조금 더 위스키 원액 함량을 올린 30% 위스키를 만들게 합니다.


해태주조가 손털고 나간 자리엔 씨그램과 합작회사인 오비씨그램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백화양조 베리나인 골드, 진로 길벗 로얄, 오비씨그램의 블랙스톤이 발매되면서 본격적인 위스키 삼국지의 막이 오릅니다. 이미 업계1위인 백화양조는 베리나인에 골드를 붙이는 정도였지만, 길벗의 패배를 되새긴 진로는 새 위스키 길벗 로얄의 컨셉을 정반대로 잡았습니다. 병도 그때 그분이 좋아했다는 외국의 유명 위스키를 연상시키게 만들고, 길벗이라는 이름은 조그맣게, 로얄은 커다랗게 써서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시바스 리갈과 거의 비슷한 맛으로 블렌딩 했다.'고 스스로 자처할 정도였습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증언식 광고로 세계수준에 손색없는 위스키라는 이미지를 심으려고 매우 노력했습니다. 길벗 로얄의 증언식 광고의 백미는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이 광고가 실린 1981년에 한국에선 '11회 대통령배 국제 축구 대회'가 있었습니다. 원래는 박스(Park's)축구대회라고 불리던 대회였는데, 얼마 전에 정권을 잡은 육사 골키퍼 출신 대통령이 대대적으로 외국팀을 초청해서 대규모로 개최합니다. 당시 화랑팀(국가대표 1진, 2진은 충무팀)과 아르헨티나가 결승에서 맞붙었고, 2대2 무승부로 경기가 끝납니다.


대통령배 국제 축구 대회에 출전했던 아르헨'띠'나 팀의 증언식 광고입니다. 다른 것 보다 '제가 영국에서 마셨던 위스키와 똑같은 맛과 향'이라는 대목에서 손이 오글거립니다. 진로는 로얄 길벗으로 베리나인 골드를 꺾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했지만, 시바스 리갈과 거의 비슷한 맛으로 블렌딩 했다고 자랑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참전한 OB씨그램의 씨그램은 바로 시바스 리갈을 만든 회사였으니까요. 후발주자지만 씨그램과 OB의 합작회사인 오비씨그램의 블랙스톤은 무섭게치고 올라왔습니다. 80년대 초반 1급 위스키(원액함량 30%) 시장이 제일 치열했습니다. 일단 배리나인 골드가 시장의 절반은 석권했고, 나머지 절반을 블랙스톤과 길벗 로얄이 반반씩 갈라먹고 있었습니다. 배리나인 골드를 마셔본 적이 없는 저는 당시 베리나인 골드의 인기의 비결을 모르겠습니다. 특급 위스키와는 반대로 위스키맛 기타재제주의 경우에는 진로 길벗 올드의 압승이었습니다.


19.99% 한계까지 위스키 원액을 채워 넣은 기타재제주 길벗 올드는 아무리 봐도 어떤 유명한 위스키를 그대로 배꼈습니다. 길벗 로얄은 시바스 리갈을 연상시키는 정도지만 이건 올드파하고 같이 놓으면 구분이 안갈 정도입니다. 만화 바텐더의 에피소드로도 유명한 '자빠지지 않는 올드 파'까지 재현하다니. 광고 내용은 한방울(0.01%)의 차이지만 가격은 절반이라는 기타재제주의 장점을 설파하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위스키 가격의 대부분은 세금이라(공장 출고가의 318%가 세금으로 붙음) 주세만 절반을 낮춰도 꽤 저렴하게 팔 수 있었죠. 그래서 위스키의 이름은 쓰지 못하지만 위스키 타입이라는 이름으로 기타제재주가 꽤 많이 나왔습니다. 길벗 올드도 '위스키 원액'으로 만든다고 할 뿐, 직접 위스키라고는 안 합니다. 길벗 올드 위스키가 많이 팔렸던 이유 중에 하나가 가짜 양주 만들기에 딱 좋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 시절에 2,500 만원이라니 지금이라면 몇 억 규모로군요, 길벗 올드를 사다 빈병에 채우는 것은 가장 손쉬운 가짜 양주 만드는 법이었을 겁니다.


위스키 회사가 기술력을 총동원한 '위스키 맛 술'이니까요. 이 시절의 피튀기는 경쟁에 얽힌 에피소드(과대광고 싸움, 원액 수령 싸움, 보사부와의 갈등, 점유율 싸움)를 일일히 언급하다가는 포스팅이 몇 배로 늘어 날테니 가장 크고 굵은 사건 하나만 소개합니다. 다들 우리가 만드는 위스키가 12년 몰트 위스키를 사용해서 만드는 '세계 수준의 위스키'라며 신문 지상에서 원액의 수령 문제를 가지고 박터지게 싸우다가, 3개 회사 모두 깨갱하고 꼬리를 말고 도망쳤습니다. 영국 스카치위스키 협회에서 12년 숙성 표기를 빼고, 원액 30%에 주정 70%로 만든 위스키라는 사실을 명시하도록 통보해왔기 때문입니다. 3회사 모두 영국에서 위스키 원액을 수입하고 있으니 요구를 따르지 않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씨그램과의 합작회사인 오비씨그램이 제일 먼저 권고를 따릅니다. 국산 위스키의 길은 멀고도 험한 것이었을까요?


다들 지금쯤 잊고 있으시겠지만 원래 저 3회사는 '국산 위스키 원액'을 생산한다는 조건으로 위스키를 팔고 있었습니다. 다들 80년대 초반에 위스키 제조 공장을 세우고 83년 전후로 첫 생산에 들어갑니다. 오비씨그램이 좀 일찍 생산에 들어갔지만, 위스키 원액이라는 게 만든다고 바로 쓸 수 있는게 아니죠. 5년은 숙성을 시켜야 '위스키 원액'이라고 부를 수 있으니까요. 빛을 보려면 좀 기다려야 합니다. 1984년 위스키 삼국지의 마지막 전투인 특급 위스키 대전이 벌어집니다. 위스키 원액 30%에 주정 70%를 섞는 1급 위스키가 아닌 위스키 원액으로만 만드는 진정한 위스키를 만들라는 정부의 지시가 내려옵니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맞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술을 만들라는 것이었죠. 아직 쓸 수는 없지만 '국산 위스키 원액'의 생산도 들어갔으니 위스키에 대한 고삐를 조금 늦춰도 되리라고 판단 했던 것 같습니다. 백화양조는 베스트셀러 베리나인 골드에 킹을 붙여 베리나인 골드 킹을 출시했고, 진로는 V.I.P 그리고 오비씨그램은 패스포트를 출시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특급 위스키 대전의 승리를 거머쥔 것은 오비씨그램의 패스포트였습니다. 지금도 마트에 가면 팔고 있을 정도니까요.


세계 114개국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패스포트는 시그램 계열인 윌리엄 롱모어사에서 1968년에 발매한 스카치 위스키입니다. 말하자면 라이센스 생산인 셈인데, 과연 진짜 패스포트하고 맛이 같았을지 조금 궁금합니다. 3차전에서 베리나인 골드 킹이 망한 이유가 안일한 수평적 브랜드 확장이었다면, 진로 VIP가 망한 이유로 '안일한 마케팅'으로 꼽는사람도 있었습니다. 진로 소주에 끼워 팔기를 했다고 하니 당시에 진로 소주가 잘나가긴 잘 나갔던 모양입니다. 1984년에 위스키 원액을 100% 사용�[https://www.youtube.com/watch?v=d4cEMz4D78A � 특급] 위스키가 발매되고, 1987년에 드디어 국산 위스키 원액을 사용한 위스키가 나옵니다. 기사를 읽어보니 아직 100% 국산 위스키를 만들기에는 원액의 비축량이 모자르기 때문에 89년까지 점차적으로 늘려나갈 계획이었군요. 이렇게 국산 위스키 원액을 사용한 오비씨그램의 디프로매트와 진로의 다크호스가 발매됩니다. 베리나인을 만들던 백화양조는 1985년에 오비씨그램에 합병되었습니다.


백화양조가 만들었던 위스키 원액은 디프로매트 만드는데 쓰였겠죠. 의욕적으로 발매한 국산 위스키지만, 판매는 지지부진 했습니다. 아직 위스키 원액 생산능력도 높지않고 부족한 국산 원액 때문에 주정을 70%섞어 만든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죠, 이제 겨우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니까요. 원래 위스키 산업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제목을 보고 '도대체 국산 위스키 최후의 날은 언제 나오는거야? 하고 기다리셨던 분들의 허를 찌를 정도로 갑작스럽게 국산 위스키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국산 위스키 원액은 1991년에 사라집니다. 큰 돈을 들여 공장도 설립하고 수년동안 묵혀서 만든 위스키 원액을 겨우 5년 밖에 쓰지 않았습니다. 국산 위스키 원액 생산을 포기하게 된 이유로 장기숙성에 따른 재고 부담과 외국 수입 원액과의 가격차이를 이유로 꼽고 있는데, 보다 근본적이고 원초척이며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조니워커 칵테일 스쿨(구 오비씨그램 칵테일 스쿨)에 다닐때 당시에 국산 위스키 원액을 만들었던 공장장님에게 들은 이야긴데, 한국에서 만들던 위스키 원액은 천사의 몫(Angel's share)이 무려 5%였다고 합니다.


숙성시키는 오크통에서 자연히 증발되는 천사의 몫은 보통 2% 정도로 알려져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환경이 스코틀랜드하고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북쪽으로 사할린 끝까지 올라가야 스코틀랜드하고 비슷한 위도가 됩니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타케츠루 마사타카가 산토리 위스키를 나와서 홋카이도 요이치에 닛카 위스키를 세운 것도 '조금이라도 스코틀랜드와 비슷한 환경'을 위해서라고 하죠. 천사의 몫이 5%라는 것은 12년 숙성을 시키면 원액이 55%밖에 남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12년 숙성이 이러니 15년 18년 숙성은 꿈도 못 꿉니다. 21년 숙성 시키면 34%, 3분의 2가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셈입니다. 애초에 수입 위스키 원액을 대체한다는 목적만 갖고 있던 국산 위스키 원액 생산은 채산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 알려지자 딱 오 년 만에 국산 위스키 원액으로 만든 위스키는 사라지게 됩니다. 1991년쯤 되면 슬슬 먹고 살만해져서 해외여행도 자유화 되었으니까요. 오히려 영국에서 스카치위스키 시장을 개방하라고 압력이 들어올 정도였죠. 국산 위스키가 첫 선을 보인 1987년, 이때 제일 각광을 받았던 것은 오비씨그램에 합병은 됐지만 이름은 남아있던 베리나인에서 나온 '썸싱 스페셜'이었습니다. 이렇게 국산 위스키의 전성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국산 위스키도 외국에서 사온 원액을 블렌딩해서 만들고, IMF지나면서 주류회사들이 외국계 주류회사들에 합병되 이리저리 갈라지면서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죠. 오비씨그램은 조니워커의 디아지오 코리아가 되었고, 패스포트는 페르노리카 코리아에서 나옵니다. 시그램이 페르노리카에 먹힌거니까 IMF의 영향으라고 보긴 힘들지만. 진로 위스키도 외국계 기업에 팔렸다는 이야기가 어렴풋이 들은듯 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위스키의 역사를 살펴보니, 정부 정책과 세금에 따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본고장 위스키 산업'다워보입니다. 애초에 스카치 위스키라는 게 세금을 피해서 스코틀랜드로 도망쳐 와서 만들기 시작한게 시초니까요.


] 경기장은 직사각형이며, 바닥은 천연잔디나 인조잔디, 흙 등으로 이뤄져 있다. 경기장 양 끝에 놓인 상대방 골대 사이로 공을 통과시키면 득점이 된다. 선수 중 골키퍼만 팔과 손으로도 공을 건드릴 수 있으며, 나머지 선수는 팔과 손을 제외한 신체 부위로만 공을 다룰수 있다. ] 이 된다. 주로 발을 써서 공을 차며, 공이 공중에 떠있을 때에는 몸과 머리를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경기 종료 시점까지 더 많은 득점을 올린 팀이 승리하며, 동점일 때는 대회 규칙에 따라 무승부로 처리하거나 연장전과 승부차기로 승패를 결정 짓는다. 경기 방식이 리그일 경우에는 연장전 없이 무승부로 처리가 되며 토너먼트일 경우라 할 지라도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을 채택할 경우에는 무승부로 처리되어 원정 다득점 원칙을 따르지만, 단판의 토너먼트일 때는 무승부가 되면 연장전과 승부차기로 승패를 결정하게 된다. 현대적 의미의 축구는 1863년 영국 잉글랜드에서 축구협회가 창설되면서 시작되었고, 1863년 만들어진 규칙을 기본으로 한 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국제 축구 연맹(FIFA)이 주관해 4년마다 국제 대회인 FIFA 월드컵이 개최되고 있다. 축구(蹴球)는‘공을 발로 찬다.’라는 뜻을 지닌 한자어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에서 들어온 말이다. ])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사실 축구가 처음 한반도에 전래할 당시에 한국(당시 조선)에 영국 해군이 제물포항에 입항하여 편을 갈라 축구 경기를 하였고, 경기가 끝난 뒤 구경을 나온 한국 사람과 공을 가지고 놀았는데, 운동 경기의 이름을 몰라서 척구(躑球 또는 踢球)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 그러나 한국어에서 말하는 족구는 다른 스포츠이다. 오늘날 영어에서 축구를 의미하는 단어는 풋볼(영어: football)이다. 몇몇 영어권 나라에서는 사커라고도 한다. 1863년 잉글랜드 축구 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가 처음 창설 되었을때는, 다른 풋볼 방식인 rugby football과 구분되기 위해 association football 이라고 불리다가, 그것이 현재에는 간단히 풋볼(football)로 불리게 되었다. 트리니다드토바고, 자메이카 그리고 이밖의 나라들 포함), 몰타, 인도, 나이지리아, 카메룬, 푸에르토리코, 파키스탄, 홍콩, 라이베리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카리브해 그리고 중미에 걸친 나라들에서 일반적으로 football로 쓰인다.


한편 '사커'로만 명명하는 국가는 미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아일랜드, 일본, 짐바브웨, 대한민국 등으로 제한적이며, 이외 유럽 등 대다수의 국가는 여러 자국어 호칭이 있기는 하지만 ‘풋볼’이 일반적이다. 축구가 세계적인 스포츠가 된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사커’보다 풋볼을 더 흔히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발을 이용한 다른 유사 스포츠들─럭비, 미식축구, 오지풋볼, 갤릭풋볼 등─이 인기를 끄는 몇몇 나라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풋볼보다 ‘사커’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 대한민국에서도 다른 유사 축구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아식축구’(←association式蹴球)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 있다. 공을 차며 돌아다니는 형식의 게임 방식은 오래전부터 많은 나라에서 행해져 왔다. ]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면서 축구는 중세 유럽 곳곳에서 행해졌다. 현대적 규칙의 축구는 잉글랜드 사립학교(public school)들에서 행해지던 광범위하고 다양한 형태의 풋볼을 표준화하려 한 19세기 중반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1848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처음 작성된 케임브리지 규칙은 뒤에 현대 축구를 포함한 규칙의 발전을 이루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이 규칙은 현대 축구의 규칙과 거의 유사했다.


그러나 이 규칙은 처음엔 보편적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1850년대 사이에 이르러, 여러 학교 또는 대학교에서 분리되어 다양한 형태의 축구를 하는 많은 클럽이 영어권 곳곳에 형성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857년에는 세계 최초의 아마추어 축구 클럽인 셰필드 FC를 사립학교의 졸업생이 창단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셰필드 FC 창단을 발판으로 셰필드 FA가 1867년에 창립되었다. 1862년 노팅엄에서 세계 최초의 프로 축구 팀인 노츠카운티 FC가 창단되었다. 노츠카운티의 창단은 축구 협회와 규칙이 그 다음 해에 세워지는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의의가 있다. 1863년 10월 26일 런던에 있는 학교들과 스포츠 클럽들은 프리메이슨 테이번이라는 선술집(Pub)에서 축구 규칙의 통합을 위해 모였다. 처음에는 제각기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해 12월까지 5번 정도 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점점 하나의 이견으로 좁혀졌고, ‘국민요정’ 슈, 해외 상습 도박 혐의 불구속 기소…사기·국내 도박은 ‘무혐의’ 여기에서 현대 축구의 첫 번째 공식 규칙이 만들어졌다. ] 그러나 규칙의 최종본에서 ‘공을 들고 뛸 수 있다’와 ‘뛰는 상대를 막을 수 있다’(상대의 정강이 차기, 발 걸기, 잡기 등) 등의 두 가지 규칙이 제외되면서 이에 반발한 블랙히스를 포함한 몇몇 팀은 FA에 참가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때 FA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거나, 그 뒤에 FA를 탈퇴한 클럽들이 모여 1871년 런던에서 럭비협회(Rugby Football Union)를 만들었고, 이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스포츠는 오늘날의 럭비(럭비 유니온)로 이어진다. ] 당시의 규칙은 손으로 공을 직접 다루는 것을 허용하고 크로스바도 없는 형태였는데, 그 규칙은 당시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달하던 빅토리안 풋볼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한편, 셰필드 FA는 FA가 그들의 규칙을 흡수하기도 하면서 경기 규칙 간에 차이가 별로 없던 1870년대까지, 독자적인 규칙에 따라 경기를 진행했다. 축구는 손을 사용해도 되느냐 마느냐로 또다시 나뉘게 되는데 손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 오늘날의 축구로 발전한 종목이며, 이에 반발하여 축구에서 손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에 찬성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오늘날의 럭비로 발전한 종목이 되었다. 오늘날 축구 경기 규칙은 국제 축구 평의회(IFAB)에서 규정하고 있다.


] 가장 역사가 오래된 축구 대회는 FA컵으로, C.W. 얼콕이 세워 1872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의 모든 축구팀이 참여하여 자웅을 겨루는 대회이다. 첫 공식 국가대표팀 간의 국제경기는 1872년에 글래스고에서 벌어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기이며, 이 또한 얼콕의 주도로 이루어졌다.youtube.com 잉글랜드는 세계 최초 축구 리그인 풋볼 리그(Football League)의 발상지이기도 한데, 이 리그는 당시 애스턴 빌라의 중역이었던 윌리엄 맥그레고에 의해 1888년 설립되었다. 초기의 시스템은 잉글랜드 중부와 북부의 12클럽이 참여하는 식이었다. ] 그러나 축구 국제경기가 대중적으로 변해 감에 따라 국제 축구 연맹은 1913년에 국제 축구 평의회(IFAB)의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국제 축구 평의회는 현재 4명의 국제 축구 연맹 의원과 영 4개국 축구 협회에서 각각 한 명씩으로 이루어져 있다.